펜트하우스의 비밀
Chapter 1 — 펜트하우스의 비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서류 봉투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알민규, 그 이름 세 글자가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5년간의 헌신, 그의 옆자리를 지키기 위해 포기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루소율 씨, 알민규 전무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인사팀 박 대리의 무표정한 얼굴이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사직서였다. 그것도 알민규의 친필 서명이 담긴.
루소율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물었다.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요?”
박 대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무적인 말투로 답했다. “전무님께서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사 방침에 따른 인사 이동이라고만…”
거짓말. 새하얀 사직서 용지에 찍힌 붉은 도장이 마치 비웃는 듯했다. 알민규는 단 한 번도 회사 방침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늘 효율성과 성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5년 동안, 루소율은 그의 기대를 단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에 맞춰 쉼 없이 달려왔다. 야근은 기본이었고, 주말에도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대기했다. 모든 것을 감수하며 그의 곁을 지켰다.
알민규, 태성 그룹의 후계자이자 냉철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남자. 루소율은 그의 비서로 일하며 그의 차가운 가면 속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밤늦게까지 일하며 나누었던 짧은 대화들, 가끔씩 보여주던 희미한 미소. 루소율은 그것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놓인 사직서는 그녀의 믿음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었다.
태성 그룹은 대한민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재벌이었다. 알민규는 그룹 회장의 외아들이자, 차기 후계자로서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관심 대상이었고, 그의 한 마디는 시장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소율은 태성 그룹에 입사하기 위해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치열한 경쟁을 뚫었다. 명문대 졸업은 기본이었고,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업무 능력은 필수였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알민규의 비서 자리를 꿰찼다. 그 자리는 단순히 그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아닌, 그의 오른팔이자 가장 가까운 조력자였다. 그의 스케줄 관리부터 회의 준비, 중요한 계약 체결까지, 루소율은 그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사직서를 받아든 루소율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무도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알민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루소율은 깊게 숨을 쉬며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5년 동안 쌓아온 자신의 커리어를, 그리고 알민규와의 관계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결국, 루소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민규의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들어와.”
심호흡을 한 루소율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넓고 웅장한 사무실은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알민규는 고개를 들어 루소율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예전과 다름없이 냉정하고 무심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루소율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무님, 이건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알민규는 잠시 루소율을 빤히 바라보더니, 싸늘하게 대답했다. “잘못? 없어. 그냥… 이제 네가 필요 없어졌을 뿐이야.”
루소율은 그의 차가운 대답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5년 동안 그에게 헌신했던 시간들이, 그의 미소에 설렜던 순간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를 버리시는 거죠?” 루소율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알민규는 휴지를 뽑아 루소율에게 건네지도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 “비서 자리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어. 착각하지 마.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
그의 매정한 말에 루소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알민규는 처음부터 그녀를 그저 이용 가치 있는 존재로만 여겼던 것이다.
며칠 후, 루소율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태성 그룹을 떠났다. 그녀는 깊은 절망감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복수를 다짐했다. 알민규에게, 그리고 그를 이렇게 만든 태성 그룹에. 그녀는 반드시 성공해서 그들에게 후회하게 만들 것이라고 맹세했다.
6개월 후, 루소율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재능과 지식을 쏟아부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녀의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고, 그녀는 순식간에 업계의 주목을 받는 신예 사업가로 떠올랐다. 그녀의 성공 소식은 곧 태성 그룹에도 전해졌다.
어느 날, 루소율은 중요한 사업 파트너와의 미팅을 위해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소율.”
루소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6개월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알민규가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예전처럼 차갑지 않았고, 어딘가 모르게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오랜만이군.” 알민규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그의 말에 루소율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전무님과 나눌 이야기가 없을 것 같은데요.”
알민규는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루소율은 그의 사과에 비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죠? 전무님은 이미 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셨어요.”
알민규는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루소율을 바라봤다. “정말이야. 그때는 내가….”
바로 그때, 누군가가 루소율의 어깨를 감싸며 다가왔다. “자기야, 오래 기다렸지?”
루소율의 옆에 선 남자는 다름 아닌 태성 그룹의 경쟁사인 진성 그룹의 후계자, 유도현이었다. 그는 알민규를 향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 전무님, 여기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루소율 씨와는 아주 특별한 사이라서요.”
알민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유도현과 루소율을 번갈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소율은 알민규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유도현의 팔짱을 꼈다. “가요, 알민규 씨. 더 이상 볼일 없으니까.”
루소율과 유도현이 함께 호텔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알민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루소율을 되찾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몰랐다. 루소율의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