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짜리 비밀의 무게

Chapter 1 — 6살짜리 비밀의 무게

“하율아, 제발… 딱 한 번만 생각해 줘.”

귓가에 맴도는 그의 절박한 목소리가 5년 전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천서율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쥐었다. 화면에는 ‘윤현민 전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5년.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그가 왜 지금,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이 판교 디자인 그룹의 신입 디자이너로 합격한 바로 이 날 전화를 걸어온 걸까?

천서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5년 전, 그녀는 스물두 살의 풋풋한 대학생이었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윤현민을 만났고, 그의 냉철함 속에 숨겨진 따뜻함에 끌려 격렬한 사랑에 빠졌다. 재벌 3세라는 그의 배경은 처음부터 불안 요소였지만, 천서율은 그와 함께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달랐다. 그의 어머니, 즉 그룹 회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윤현민은 결국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우리… 헤어지자.”

그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는 천서율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하율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현민에게 알릴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혼자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의 삶에, 그리고 강대한 그룹의 후계 구도에 하율이가 얽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5년 동안 천서율은 악착같이 살았다. 디자인 공부를 놓지 않으면서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뛰었고, 하율이에게 부족함 없는 엄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판교 디자인 그룹의 신입 디자이너로 당당히 합격했다. 이제 하율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여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심장이 멎을 듯 했다.

“천서율아, 나야. 윤현민.”

그의 목소리는 5년 전과 똑같았다. 낮고 묵직한 울림이 천서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잘 지냈어?”

“……네.”

“미안하다. 너무 늦게 연락했지.”

“무슨 일 있으세요?”

천서율은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현민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왜…죠?”

“할 말이 있어. 꼭 해야 할 말이.”

천서율은 망설였다. 다시 그를 만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5년 동안 애써 묻어둔 감정이 다시 살아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할 말’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알겠어요.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세요.”

전화를 끊고 천서율은 창밖을 바라봤다. 5년 전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처럼, 오늘따라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맑았다. 하지만 천서율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현민이 하려는 말이 무엇일까? 그리고… 하율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

주말, 약속 장소는 강남의 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천서율은 최대한 수수하게 옷을 입었지만, 감출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윤현민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5년 전보다 더 남자다워진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깊어진 눈매는 그의 지난 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천서율아, 와줘서 고마워.”

윤현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서율을 맞이했다. 하지만 천서율은 그의 눈빛에서 어딘가 슬픔을 느꼈다. 마주 앉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았지만, 천서율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천서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윤현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서율아… 사실, 나….”

그때, 누군가 천서율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이 되어 있었다.

“윤현민 씨, 여기서 뭐 하세요? 회의 늦겠어요!”

여자는 윤현민의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말했다. 윤현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아… 소개할게. 내 약혼자, 유진이야.”

천서율은 숨을 멈췄다. 약혼자? 5년 만에 다시 만난 그가, 약혼자가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여자의 다음 말이었다.

“어머, 윤현민 씨. 이분은 누구세요? 혹시… 옛날 여자친구?”

유진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천서율을 훑어봤다. 천서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윤현민을 바라볼 뿐이었다. 윤현민은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천서율과 유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유진아, 오해가 있어. 이분은….”

윤현민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유진이 갑자기 천서율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윤현민 씨, 곧 그룹 후계자가 돼요. 옛날 여자친구 때문에 망신당하는 일 없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특히… 비밀스러운 아이 같은 거, 없어야겠죠?”

천서율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유진은 어떻게 하율이의 존재를 안 걸까? 그리고… 윤현민은 정말 하율이를 모르는 걸까? 천서율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유진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윤현민의 팔짱을 끼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천서율은 그 자리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하율이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다. 천서율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천서율 씨 되시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맞는데요.”

“윤현민 전무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즉시 판교 디자인 그룹 회장실로 와 주십시오.”

전화는 뚝 끊겼다. 천서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윤현민이 왜 그녀를 회장실로 부르는 걸까? 그리고… 하율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까? 천서율은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