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문자, 삭제된 밤
Chapter 1 — 금지된 문자, 삭제된 밤
핏빛 노을이 창밖을 물들이던 그 날, 나는 그의 파멸을 예감했다. 혹은, 우리 모두의 파멸을.
설민혁, 그는 대한민국 경제계를 쥐락펴락하는 태성 그룹 회장의 외아들이자, 내 약혼자의 이복오빠였다. 그리고… 내가 감히 넘봐서는 안 될 존재였다.
“석채린 씨,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날카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태성 그룹 본사 27층, 그의 집무실은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와 짙은 색의 원목 가구들은 그의 냉철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네, 전무님. 무슨 일이신지…”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하며 그의 앞에 섰다. 설민혁은 키가 훤칠하고,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이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그의 미소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요?”
그의 질문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박서준, 그의 동생이자 내 약혼자와의 결혼은 태성 그룹과 한울 그룹의 정략결혼이었다. 두 회사의 미래를 위한, 철저하게 계산된 비즈니스였다.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관계.
“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설민혁의 시선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내 불안함, 외로움, 그리고… 그에게 느끼는 위험한 끌림까지 모두 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석채린 씨는… 박서준이를 사랑하나요?”
그의 질문은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준비된 대답을 내뱉었다.
“네, 물론입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는 차가웠고, 슬펐으며, 동시에… 묘하게 위태로워 보였다.
“거짓말.”
단호한 그의 한마디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그의 존재감이 턱밑까지 느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깊숙이 응시했다.
“석채린 씨, 당신은 지금… 나를 원하고 있어.”
그의 속삭임은 마치 저주처럼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나는 그의 위험한 매력에 이미 깊숙이 빠져버린 것이다.
“안 됩니다… 전무님.”
나는 간신히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나를 쫓을 기세였다.
“왜 안 돼? 석채린 씨도 알고 있잖아. 박서준이는 당신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어. 그는 그저… 태성 그룹의 후계자일 뿐이야.”
그의 말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박서준은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의 결혼은 그저… 비즈니스일 뿐이었다.
“하지만… 전 약혼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무님은…”
“나는 당신의 시아버지 될 사람의 아들이지.” 그는 말을 마쳤다. “그게 문제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설민혁은 너무나 위험한 존재였다. 그와 엮이는 순간, 내 인생은 송두리째 망가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유혹을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 봐, 석채린 씨.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가짜 사랑에 갇혀 평생 불행하게 살아갈 건지, 아니면… 진실된 욕망을 따라 위험한 게임을 시작할 건지.”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회색 코트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나를 옭아매는 덫처럼 느껴졌다.
며칠 후,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웨딩드레스 샵에서 나는 설민혁에게서 온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짧고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오늘 밤 10시, 강남역 7번 출구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덫에 걸려들고 있는 것일까.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장서윤였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설민혁의 오랜 친구.
“석채린아, 드레스 너무 예쁘다! 역시 너한테 딱이야!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서윤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는 내 불안함, 두려움, 그리고… 숨겨진 욕망까지 모두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설민혁 전무님 만났어?”
서윤의 질문에 나는 굳어버렸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내 대답에 서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석채린아… 그 사람, 정말 위험한 사람이야. 절대… 가까이하지 마.”
서윤의 경고는 마치 예언처럼 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나는 이미… 그의 회색 코트의 덫에 깊숙이 빠져버린 것이다. 그날 밤, 나는 강남역 7번 출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