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의 남편
Chapter 1 — 서류상의 남편
“3개월. 딱 3개월만, 제 약혼자 역할을 해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했지만, 내겐 그저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 쏟아지는 햇살 아래 빛나는 그녀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노하영. 대한민국 최고 그룹, 서현그룹의 외동딸. 그리고 내 앞에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앉아있는 여자.
“감태윤 씨, 부탁드려요.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나는 와인 잔을 기울이며 그녀의 다급한 눈빛을 외면했다. 3개월이라. 재벌가의 약혼자 대행이라니.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서현그룹의 외동딸, 노하영. 그녀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언론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고, 그녀가 입는 옷, 사용하는 화장품은 순식간에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정해놓은 정략결혼 상대가 있어요. 도저히… 그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정략결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서현그룹 정도 되는 대기업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룹 회장, 노 회장은 자신의 딸을 이용해 정략결혼을 추진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감태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럼, 저는 왜 당신의 약혼자 역할을 해야 하죠? 저에게 어떤 이득이 있나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약혼자 역할을 하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돈? 명예? 아니면… 다른 무언가?
“물론…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거예요. 감태윤 씨가 원하는 건 뭐든지… 최대한 맞춰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재벌가의 딸다운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돈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녀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노하영 씨, 당신 자신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나의 제안에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진심을 전했다. 나는 그녀에게 돈이나 명예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 노하영이라는 여자 자체가 탐이 났던 것이다.
“농담… 이시죠?”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농담은 아닙니다. 노하영 씨. 저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제 옆에 있어줘야만…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던졌다. 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나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그때, 누군가 레스토랑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노하영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낯선 남자의 등장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누구일까? 그녀의 정략결혼 상대일까? 아니면… 또 다른 변수일까?
나는 와인 잔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부터 게임은 시작이다. 노하영, 그녀를 내 손에 넣기 위한… 그리고 내 복수를 위한 게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