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의 규칙

Chapter 8 — 가짜 약혼녀의 붉은 립스틱

카페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방금 전까지 편수아의 붉은 립스틱이 닿았던 향준식의 입술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맹수처럼 번뜩이며, 방금 전까지 자신과 편수아 사이에 놓여 있던 도경수를 꿰뚫어 볼 듯했다. 하지만 그 맹렬한 시선은 이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이제 막 등장한 낯선 인물에게 향했다.

그는 짙은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커다란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언저리로 보였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그 이상의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상황을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 잠시 동안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향준식이었지만, 이내 편수아에게로 옮겨갔다. 그 시선 속에는 묘한 흥미와 함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집요함이 담겨 있었다.

“이런, 제가 너무 늦었나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날카로움은 마치 잘 벼린 칼날 같았다. 그는 천천히 향준식과 편수아, 그리고 도경수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마치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향준식 군. 그리고… 편수아 양.”

그는 편수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편수아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이 남자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도경수 앞에서 계약 관계임을 폭로하며 겨우 숨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위기가 닥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누구시죠?”

향준식이 차갑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역력했다. 그는 낯선 남자가 편수아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낯선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었고, 그제야 그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차갑고 계산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자신감에 찬 표정이었다.

“강태준이라고 합니다.”

강태준. 그 이름은 향준식의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그는 이 이름을 알았다. 아니, 알아야만 하는 이름이었다. 태성 그룹의 오랜 경쟁사이자, 현재는 거의 몰락한 것으로 알려진 ‘빛나는 미래’ 그룹의 막내아들. 하지만 그는 곧 이 남자가 단순한 경쟁사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빛, 그의 말투, 그의 존재감… 모든 것이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나타났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빛나는 미래?”

향준식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경계심이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빛나는 미래 그룹은 몇 년 전, 거대한 부채와 경영난으로 인해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런 그룹의 막내아들이, 그것도 향준식과 편수아, 그리고 도경수라는 세 사람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이 순간에 나타나다니.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맞습니다. 향준식 군,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역시… 명석하시네요.”

강태준은 향준식의 반응을 즐기듯,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편수아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더욱 노골적인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편수아 양.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향준식 군이 얼마나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의 말은 편수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소중하게 생각한다니. 향준식이 자신에 대해 저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는 말인가? 그녀는 향준식을 흘긋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강태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말, 진심입니까?”

편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향준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모두 계약 속의 또 다른 거짓말일까.

향준식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그의 눈빛은 더욱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의 침묵은 편수아에게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혼란을 안겨주었다. 도경수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찌르는 듯했지만, 그녀는 오직 향준식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도경수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태준 씨,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향준식 군 약혼녀가 제 친구인데, 혹시 그 친구분 관련해서 온 건가요?”

도경수는 강태준이 편수아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그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말은 향준식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고, 강태준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평정을 되찾고, 도경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도경수 양. 저는… 향준식 군과 편수아 양, 두 분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특히 편수아 양에게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 말입니다.”

강태준은 편수아를 향해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마침내 털어놓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무겁고 진지했다. 편수아는 그의 말에 숨을 죽였다. 중요한 이야기라니. 그것은 무엇일까. 설마, 향준식과의 계약에 관한 또 다른 비밀일까. 아니면…

“제가 향준식 군을 처음 만난 건, 편수아 양을 만나기 훨씬 전이었죠. 우리는… 아주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강태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향준식과의 관계를 먼저 언급했다. 향준식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낯선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도진 듯한, 혹은… 잊고 싶었던 과거를 마주한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특별한 관계라니요. 우리는 경쟁자일 뿐입니다.”

향준식이 차갑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강태준은 그의 반응을 즐기듯, 더욱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경쟁자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편수아 양은… 제가 향준식 군보다 먼저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강태준의 말은 마치 벼락처럼 편수아의 귓가에 꽂혔다. 그녀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였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은 향준식을 만나기 전까지, 그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자신을 먼저 알았다는 듯이 말할 수 있는 걸까.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죠?”

편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당혹감과 함께, 강한 의심이 서려 있었다. 향준식은 그런 편수아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도 전에, 강태준이 먼저 말을 끊었다.

“헛소리라… 아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편수아 양. 당신이 오래전, 아주 우연히… 저와 마주쳤던 날을 기억하시나요? 그때, 당신은…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죠.”

그가 ‘붉은 립스틱’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편수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듯했다. 붉은 립스틱. 아주 오래전, 그녀가 잊고 싶었던,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파편이 그의 말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그녀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그날, 그녀는…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