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길의 고백

Chapter 5 — 얼음 공주의 붉은 장미

차가운 바람이 인사팀 사무실의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동은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낯선 여인의 눈빛에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그 안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복현도의 누나, 박 회장의 손녀. 지금까지 복현도의 침묵 뒤에 숨겨져 있던 진실의 한 조각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제가… 필요한 거군요?”

여자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묘하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그녀의 말은 동은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동은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바로 10년 전 복현도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켜달라고 부탁했던 그 인물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 여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복현도의 '가짜' 약혼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동은채 대리. 맞지?”

여자가 동은채의 이름을 정확히 짚어내자, 동은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동은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명백한 경멸과 함께, 동은채가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복현도 팀장에게… 그렇게까지 헌신할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네.”

헌신이라니. 동은채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헌신이 아니라, 박 회장의 부탁과 복현도의 알 수 없는 압박 때문이었다. 복현도의 누나는 동은채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그 짐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 저는…”

동은채가 변명이라도 하려 입을 열었을 때, 복현도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동은채와 그의 누나,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명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평소의 냉철함을 되찾았다. 그의 누나는 동은채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복현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빠. 드디어 ‘그 여자’를 데려온 거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그 여자’. 동은채는 복현도의 누나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녀는 복현도의 옆에 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복현도는 동은채의 눈을 피하며, 그의 누나에게 말했다.

“아무나 들이라고 한 적 없어. 네 옆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복현도의 말은 그의 누나를 향했지만, 그 의미는 동은채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그는 동은채에게 ‘아무나’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누나에게 ‘너 역시 아무나가 아니다’라고 경고하는 것이었을까. 동은채는 복현도의 복잡한 속내를 읽어내기 어려웠다. 그는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 침묵 속에 모든 것을 감추고 있었다.

복현도의 누나는 복현도의 말에 비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나? 그럼 오빠의 ‘약혼녀’라는 이 사람은… 오빠에게 아무나인 거야?”

그녀의 질문은 동은채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사실이었다. 자신은 복현도의 ‘가짜’ 약혼녀였다. 하지만 복현도의 누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동은채를 깎아내리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동은채는 복현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의 누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모든 것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도, 아무나 아니야.”

복현도의 대답은 놀랍도록 단호했다. 그는 동은채의 손을 꽉 잡으며, 그의 누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동은채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차갑기만 했던 그의 손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의 단호한 눈빛은 동은채를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누나를 향한 것이었을까.

복현도의 누나는 동은채의 손을 잡은 복현도의 팔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불꽃을 뿜어낼 듯했다. “정말… 그래? 나는 오빠가 이렇게까지 ‘아무나’에게 의지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동은채에게 시선을 돌리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동은채 대리. 오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숨기고 있어. 당신이 알고 있는 전부가 진실은 아닐 거라는 거지. 그리고… 당신 또한.”

그녀는 동은채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내가 가진 진실은… 당신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울 거야. 그러니… 쓸데없이 오빠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마. 그게 당신을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

여자의 말은 단순히 경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위협이었다. 동은채는 그녀의 눈빛에서 10년 전 어머니가 지켜달라고 했던 누군가의 슬픔이 아닌,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차가운 야심을 보았다. 그리고 복현도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었다.

동은채는 복현도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단단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그녀는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자신을 느꼈다. 복현도의 누나는 만족스러운 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곧…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든 것이 명확해질 거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동은채를 꿰뚫어 보듯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벚꽃 잎 말이야. 그건… 정말 아름다운 상징이지. 그렇지 않아?”

벚꽃 잎. 그 단어가 동은채의 귓가에 울려 퍼지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복현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고와 관련된 그 벚꽃 잎. 복현도의 누나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벚꽃 잎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동은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복현도의 누나가 보여준 것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어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