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의 규칙
Chapter 4 — 차가운 빗방울, 뜨거운 속삭임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다. 카페 안의 아늑한 조명과는 대조적으로, 밖은 금방이라도 세상이 물에 잠길 듯 거세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편수아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감쌌다. 향준식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계약은 끝나지 않았어.’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분명 도경수의 거짓말을 간파한 듯했지만, 왜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순히 그의 필요 때문에 계약 연애를 했을 뿐인데,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갇힌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 해?”
나른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편수아의 상념을 깨뜨렸다. 향준식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커피 잔을 쥔 그녀의 손을 훑었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편수아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표정이 그렇게 심각한가?” 향준식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아니면… 방금 내가 했던 말 때문에?”
편수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가 계약 파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계속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걸까. 도경수의 거짓말을 간파했다면, 이제 도경수와의 관계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는 그의 복잡한 속내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저… 이 계약, 정말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었고, 이제는 제 의지로 끝내고 싶습니다.” 편수아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떨림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최소한 자신의 의사만큼은 분명히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향준식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조롱이나 비웃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안쓰러운 듯한, 혹은 ‘어리석은’이라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편수아 씨, 세상에 네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제 삶은 제 것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네 삶?” 향준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네 삶은… 내 삶과 얽혀 있잖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내 삶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네 삶은 더 이상 네 것만은 아니게 된 거야.”
차가운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카페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편수아는 그의 말이 너무나도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성벽에 갇혀버린 듯한 무력감.
“이 계약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 향준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 그러나 그 속삭임은 편수아의 심장을 더욱 강하게 파고들었다. “단순한 ‘가짜 약혼녀’ 계약이 아니라는 거지.”
“그게 무슨…?”
“도경수. 그녀가 왜 갑자기 네 앞에 나타났을까?” 향준식이 질문을 던졌다. 편수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도경수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이상의 의도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네가 내 곁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꼈을 거야.”
“위협…?”
“그래. 내가… 너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순간, 편수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음?’ 그에게서 ‘마음’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차가운 눈빛 속에, 그녀를 이용하려는 계산 속에서, 그런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경수 씨도 당신과 정략결혼을 약속한 사이잖아요.” 편수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은 혼란스러웠다. 도경수는 그를 원하지만, 향준식은 편수아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함정일까?
“정략결혼? 그래, 그랬지.” 향준식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마치 방금 전의 나른함은 전부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든 변하는 법이야. 특히… 누군가 그걸 원한다면.”
그의 말은 도경수를 향한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편수아를 향한 경고 같기도 했다. 그는 편수아를 이용하려 한다. 그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용의 이유가 단순히 도경수를 견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복잡한 눈빛이, 편수아를 더욱 깊은 미궁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너에게 중요한 건… 이 계약이 왜 시작되었고, 왜 끝나지 않는지… 그리고 내가… 너를 왜 놓아줄 수 없는지… 그걸 아는 거야.” 향준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키는 편수아를 압도했고, 그가 내뿜는 기운은 카페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는 편수아의 턱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들어 올렸다. 그의 손길은 예상외로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강한 집착과 소유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는… 너를 내 곁에 두기를 원해.”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랜 시간 숨겨왔던 무언가가 그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편수아는 그의 말에 숨쉬는 것조차 잊었다. 그의 곁에 두기를 원한다는 말. 그것은 단순한 계약의 연장이 아니었다. 마치… 진짜로 그녀를 원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빗물에 젖은 외투를 걸친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어섰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편수아와 향준식을 번갈아 보더니, 곧이어 향준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향준식. 네가… 결국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편수아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몇 달 전, 우연히 마주쳤던 향준식의 오랜 친구이자, 지금은 완전히 관계가 틀어진… 김우진이었다. 그가 왜 이 시간에, 이 카페에 나타난 걸까? 그리고 향준식에게 ‘결국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향준식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방금 전까지 편수아에게 쏟아지던 그의 모든 관심이, 이제는 김우진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차가운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킬 뿐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향준식이 낮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김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편수아 씨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걸 내가… 똑똑히 봤거든.”
그의 말에 편수아는 얼어붙었다. 김우진이 자신과 향준식 사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가 보고 난 후, 향준식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뜻일까? 차가운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들렸다. 편수아는 자신이 어떤 거대한 폭풍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그걸 본 게… 대체 뭘 봤다는 거야?” 편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김우진은 향준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편수아 씨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향준식이 김우진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내 일에 끼어들지 마!”
두 남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편수아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며 카페 안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상황이, 마치 한 편의 잔혹한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연극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